왜 이 글을 쓰는가
처음엔 2장에서 책을 덮었다. 그날 밤 메모에는 “알토란 같은 책이구나”라고 남겨져 있다.
《엉망진창 속에서 살아남는 법》(How to Make Sense of Any Mess, Abby Covert 저)이다. 다이어그램 연장통으로 도배된 책이려니 했는데, 완독하고 났을 때 가장 오래 머문 자리는 4장이었다. “정보설계사(Information Architect)”라는 단어가 눈에 걸린 것이다.
“이 단어를 오늘 처음 봤는데 끌림이 있다.”
메모가 바로 달렸다. 개발을 좋아했던 이유와 어딘가 맞닿아 있는 것 같다는 직감. 설명할 언어는 없었지만, 일단 적어두었다.
엉망진창의 정체
책은 먼저 “정보”를 다시 정의한다. 정보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주관적 인식이라는 것이다.
책이 드는 예시: 잼과 잼통, 가격표와 선반은 콘텐츠다. 이것을 관찰한 결과가 데이터다. 그리고 선반의 빈 공간을 각자가 다르게 해석한 것이 정보다. 정보는 배열과 해석을 통해 만들어지고, 같은 데이터에서도 사람마다 다른 정보가 나온다.
엉망진창이란 그러므로 정보 설계의 문제다. 의도(Why)가 없거나, 방향에 대한 합의가 없거나, 같은 것을 다른 언어로 부르고 있을 때 생긴다. 책이 내놓는 해법은 단순하다. 의도를 정하고 → 언어를 고르고 → 구조를 짜고 → 측정하며 조정한다. 대단한 기술이 아니라 순서다.
직감으로 써온 것들
3장에서 다이어그램 도구상자가 나왔다. 간트 차트, 벤 다이어그램, 스윔 레인, 여정 지도, 매트릭스. 읽으며 남긴 메모는 이렇다.
“3장에서 소개한 차트들 다 한번씩은 보았던 거네. 내가 자주 활용하는 것도 보이고. 근데 이게 뭔가 나는 좀 직감적으로 쓰는 경향이 있음.”
그것들의 이름을 몰라도 쓸 수 있었다. 회의 전에 스윔 레인을 그리고, 기능 경계를 블록 다이어그램으로 잡고, 요구사항을 매트릭스로 정리했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냥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책은 그것이 “정보를 설계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인덱스처럼 읽힌 구조 이야기
6장이 흥미로웠다. 구조(Structure)와 택소노미(Taxonomy)를 다루는 챕터인데, 읽다 보니 계속 다른 것이 떠올랐다.
“구조에 대한 이야기인데 자꾸 인덱스와 유사하단 생각. 인덱스가 동작하는 방식, 담는 자료구조가 딱 구조에 대한 이야기 같음.”
책이 설명하는 구조의 종류 — 넓고 얕은 계층, 다원적 구조, 시퀀스 — 가 B-tree, 해시맵, 연결 리스트처럼 읽혔다. 택소노미(분류 체계)는 인덱스 설계와 같은 트레이드오프를 가진다. 정확할수록 유연성은 떨어진다. 같은 개념을 다양하게 표기할 수 있으면, 오히려 정확한 체계가 비효율적일 때가 있다.
그리고 이 문장이 걸렸다.
“정렬보다 어려운 건 정렬 규칙에 대한 합의.”
코드에서 경계를 긋는 일, 어느 기능을 어느 모듈에 둘지 결정하는 일 — 그 일의 어려움이 정확히 이 문장에 담겨 있었다. 혼자 결정할 때보다 여럿이 함께 규칙을 만들 때가 훨씬 어렵다. 그 어려움의 이름이 “분류”였다.
처음 본 단어에서 끌림이 생길 때
4장에서 “정보설계사(Information Architect)”를 처음 만났다.
IA는 정보를 구조화하고 의도를 담아 배열하는 역할이다. 책은 전제를 이렇게 깐다. “IA는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무언가를 만드는 모든 사람의 기술이다.” 디자이너도, 개발자도, 기획자도 매일 IA를 하고 있다. 다만 그 이름을 모를 뿐이다.
이 전제가 예전 질문과 연결됐다. 왜 분류 전문가는 없는가 — 분류를 전문 직함으로 부르지 않는 이유는, 분류가 누군가에게 위탁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이 직접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정보설계사도 마찬가지다. 모든 빌더가 이미 정보설계사인 것이다.
“개발을 좋아했던 이유가 이 역할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는 직감” — 이 메모가 담는 것은 아마, 코드를 짜는 일이 결국 정보를 구조화하고 의도를 배열하는 일과 같다는 인식이다. 추상 클래스 설계, 인터페이스 분리, 이벤트 구조 — 이 모두가 정보 설계의 다른 방언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 본 단어에서 끌림이 생긴다는 건,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는데 이름이 없었다는 뜻일 때가 있다.
아직 닫히지 않은 것
완독하고 나서도 닫히지 않은 것들이 남았다. “범위(Scope)와 규모(Scale)는 무엇이 다르지?” — 읽다 던진 질문이 아직 열려 있다. 레이코프의 원형론, Abby Covert의 IA, 폴소노미(folksonomy) — 키워드는 잡혔는데 이것들을 실무 역량으로 잇는 다리는 아직 없다.
정보설계사라는 단어를 더 오래 가져가며 생각해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