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재밌는 영상을 봤다. 인도 의대 입시(NEET) 문제지가 텔레그램으로 유출되자, 인도 정부가 통신사에 텔레그램 차단을 요청했다. 통신사 릴라이언스가 BGP 하이재킹을 썼고, 그 여파가 UAE까지 번지며 의도치 않은 글로벌 접속 장애로 이어졌다.
재밌었던 건 사건 자체보다 구조였다. BGP는 탈중앙 라우팅 프로토콜이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무너진다.
BGP: 신뢰 위에 세운 인터넷
BGP(Border Gateway Protocol)는 인터넷이 경로를 찾는 방식이다. 각 자율시스템(AS)이 “이 IP 대역은 내가 처리한다”고 광고하면, 다른 AS들이 그 광고를 받아들이고 경로를 정한다. 검증 없이 믿는다. 그러니 한 AS가 거짓 광고를 내보내면 전 세계 트래픽이 그리로 빨려간다.
2008년엔 파키스탄이 실수로 유튜브를 집어삼켰다. 2018년엔 아마존 DNS가 탈취돼 암호화폐가 빠져나갔다. 방어책으로 RPKI(암호 서명 기반 경로 검증)가 나왔지만 보급이 미흡하다. 탈중앙 구조인데도 신뢰 모델 때문에 취약하다.
같은 날 만난 다른 개념
마침 같은 날 읽기 시작한 책 — 알렉스 라이트의 《분류의 역사》 — 첫 장에서 낯선 단어를 만났다.
스티그머지(stigmergy).
1959년 프랑스 생물학자 피에르-폴 그라세가 흰개미 집짓기를 관찰하면서 명명한 개념이다. 수십만 마리가 하나의 정교한 구조물을 지어올리는데, 지휘자가 없다. 각 개미는 페로몬이 묻은 진흙공을 물어다 놓는다. 다른 개미가 그 냄새를 맡고 거기에 덧쌓는다. 환경에 흔적을 남기고, 흔적을 읽고, 또 흔적을 쌓는다. 직접 대화 없이 협응이 일어나고, 아치와 기둥이 창발한다.
그리스어 stigma(찌름·표시) + ergon(일). “일을 자극하는 표시.”
개미 페로몬 길도 같은 원리다. 먹이를 발견한 개미가 흔적을 남기면 다른 개미가 따라가며 강화한다. 누구도 최단경로를 계산하지 않았는데, 최단경로가 창발한다.
AntNet: 개미를 네트워크 라우팅에 이식하다
1998년 Di Caro와 Dorigo는 이 원리를 인터넷 라우팅에 적용했다. AntNet. 제어 패킷(개미)이 노드를 돌아다니며 직접 측정한 경로 품질을 테이블에 기록한다. 오래 쓰지 않는 경로 값은 증발한다. 노드가 죽으면 그 경로의 페로몬이 사라지고 다른 경로가 자동으로 강화된다. 누구도 전역 상태를 알 필요가 없다.
BGP와의 차이가 선명하다.
| BGP | AntNet | |
|---|---|---|
| 경로 근거 | 이웃의 광고(남의 말) | 직접 측정한 흔적 |
| 거짓 광고 대응 | 전역 하이재킹 | 국소 재수렴 |
| 노드 장애 | 수동 재설정 필요 | 자동 자기치유 |
탈중앙이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BGP도 탈중앙 라우팅이다. 강건성은 탈중앙 여부가 아니라 근거를 어디서 얻느냐 — 남의 주장이냐, 직접 쌓인 흔적이냐 — 에서 나온다.
에이전트들이 환경에 흔적을 남긴다
이 개념을 읽으며 뜻밖의 연결을 발견했다. 요즘 쓰는 AI 에이전트 시스템이 교과서적 스티그머지 구조다.
각 에이전트는 서로를 직접 호출하지 않는다. 대신 공유 파일 시스템과 상태 저장소에 흔적(노트, 커밋, 상태값)을 남기고, 다음 세션이 그 흔적을 읽어 이어 작업한다. 중앙 오케스트레이터 없이 환경 매개 협응이 일어난다.
설계 시사점이 생겼다. 에이전트 협업을 직접 메시지가 아니라 환경 설계로 보면, 한 에이전트의 오작동이 전역을 오염시키지 않는다. 흔적은 점점 강해지거나 자연히 증발할 뿐이다.
흰개미 수십만 마리가 회의 한 번 없이 집을 짓듯.